"아저씨, 누구도 제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요"

문화

"아저씨, 누구도 제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요"

마지막으로 손편지를 쓴 지가 얼마나 됐는지 모르겠다. 손글씨로 적어 보내는 편지는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가장 정성껏 전하는 수단이었다. 어떨 땐 잘못 쓴 문장을 까맣게 펜으로 덮지 못하고 새로운 편지지를 꺼내 처음부터 다시 써내려가기도 했다. 말이 아닌 글자를 적어 이야기하는 건 늘 시간과 마음이 드는 일이었다. 

어릴 땐 처음부터 끝까지 이러한 편지글로만 이어져 있는 <키다리 아저씨>가 몹시 낯선 형식의 연애소설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조금 크고 나서 다시 읽으니 주디 시점에서 쓰인 여러 장의 편지글을 따라가며 주디의 성장과 사랑을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다. 이제와 돌이켜보면 <키다리 아저씨>를 단순한 연애소설로 기억하는 것은 무척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 이번에 <키다리 아저씨> 애니메이션 원화와 함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에세이를 써내려가는 일은 즐거웠다. 쉽게 주눅 들지 않는 이 야무진 소녀가 대학교에서 겪는 일들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인 동시에 새로운 시점의 발견이기도 했다. 모르던 걸 배워가는 즐거움, 키다리 아저씨에 대한 애정, 그러나 기대에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 독립과 어떤 포기… 이 책을 읽는 분들도 분명히 각자의 마음속에 있던 주디를 발견하시게 되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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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주디는 정체 모를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으로 고아원에서 나와 대학 교육을 받게 된다. 18년 동안 고아원에서 스무 명의 아이들과 늘 방을 같이 써오던 주디는 대학교 기숙사에서 비로소 오롯한 혼자만의 공간을 가지게 됐다. 집이 그립다며 향수병을 앓는 친구들 사이에서 주디는 생전 처음으로 자신을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처음으로 제루샤 애벗과 
사귈 기회가 생겼어요. 
전 그 아이를 좋아하게 될 것 같아요. 
아저씨도 그럴 것 같으세요? 

자기 자신을 알아간다는 건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을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인생에는 불행한 일도 생기기 마련이지만, 주디는 이미 지나간 불행에 스스로를 동정하기보다 다음에 생길 즐거운 일을 직접 "만들어" 가기로 한다.

당연히 이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 걸까? 고아원에서 자란 주디는 출발점부터 뒤쳐지고 만 걸까?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친구들 사이에서 때로는 주눅이 들고 때론 스스로가 초라해지기도 하지만, 나의 기준을 정하는 건 나의 몫이다. 주디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자신의 행복을 인정하는 데 집중할 줄 안다. 
 
예전의 저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쭈뼛쭈뼛하곤 했었지요. 그들의 시선이 제가 입고 있는 새 옷을 꿰뚫어 그 아래에 있는 체크무늬 무명옷을 향하는 것 같아서요. 하지만 이젠 체크무늬 무명옷 따위엔 절대로 마음 쓰지 않아요. 그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나니. 

새로운 삶에 스며 있는 행복의 조각들을 적극적으로 찾아내는 주디를 지켜보면 내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도 썩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행복은 기다리는 게 아니라, 내가 이 순간에 직접 손을 내밀어 수확하면 되는 일이라는 것도. 

이제 스스로 날갯짓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주디를 후원해주는 키다리 아저씨의 유일한 조건은 한 달에 한 번씩 편지를 써서 소식을 전하라는 것이었지만, 주디는 가족이라고 상상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인 키다리 아저씨에게 수시로 수차례의 편지를 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주디는 키다리 아저씨에게 깊은 애정을 보내기도 하고 가끔은 화를 내며 실망하기도 한다. 

주디에게 키다리 아저씨는 복합적인 감정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마음 한편에는 키다리 아저씨의 후원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훌륭한 작가가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으리라. 누군가의 도움에 의지하는 것은 때로 그에게 일종의 권력을 부여하는 일이 되기도 하니 말이다. 실제로 키다리 아저씨는 서툰 애정 표현을 바탕으로 주디의 자유를 제약하려 들기도 한다. 

주디가 걷고 뛸 수 있도록 손을 잡아 이끌어주고 등을 밀어준 고마운 사람이지만, 주디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지를 보장받는 일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처한다. 
 
아저씨 외엔 그 누구도 저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어요. 그리고 아저씨도 항상 그러실 수 있는 건 아니에요!

<키다리 아저씨>는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듯이 한 편의 긴 연애편지이기도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왕자님이 구해주는 동화 속 공주님이 아니라, 키다리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이제 스스로 두 발로 설 수 있게 된 주체적인 여성의 성장기가 함께 담겨 있다.
 
아저씨. 부디 아저씨의 병아리가 제힘으로 살아가려 한다고 서운해하지 마세요. 아저씨의 병아리는 힘차게 꼬꼬댁 울 줄도 알고 아름다운 깃털도 가진, 아주 기운찬 암탉으로 자라나는 중이니까요. 

과거에 얽매여 스스로를 동정하지도 않고, 반대로 대책없는 긍정 에너지를 뿜어내는 것도 아닌 보통의 어디쯤, 나와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은 소녀의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차근히 더듬어보는 건 어떨까. 키다리 아저씨를 읽은 지 오래되었다면, 다시 책장을 넘겨 만나보는 주디는 분명히 기억 속의 소녀와 또 다른 매력을 보여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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