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년 전인 1968년 2월 21일, 한일 양국을 깜짝 놀라게 할 대형 사건이 발생했다. 장소는 도쿄역에서 서남쪽으로 자동차 2시간 거리인 시즈오카현 시미즈시(지금의 시즈오카시)였다.
이곳의 한 카바레(무도장 술집)에서 야쿠자 2명한테 빚 독촉을 받던 재일한국인 권희로(김희로)가 두 사람을 사냥총으로 살해했다. 그런 뒤 45km 떨어진 온천여관으로 이동해 여관 주인과 투숙객 등 20명을 인질로 잡고 약 3000명의 경찰과 대치했다. 영화에나 나올 법한 대형 인질극이 벌어진 것이다.
권희로는 1928년 일본에서 출생했다. 한국 언론에서 권희로로도 불리고 김희로로도 불린 것은 친부는 권씨이고 의부는 김씨였기 때문이다. 세 살 때 아버지를 잃은 그는 넝마주이를 하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다가 다섯 살때부터 의부와 함께 살았다. 한국인인 데다가 극빈층이었기 때문에 소학교(초등학교) 진학 뒤 민족차별에 시달렸다. 그래서 "조선인은 다닐 곳이 못 된다"는 생각에 중퇴했고, 의부와도 사이가 안 좋아서 열세 살에 가출했다.
이때부터 식품 절도로 감옥을 자주 들락거렸다. 그러는 사이, 전과 7범이 됐다. 이 과정에서 일본 경찰한테 모욕도 많이 당했다. 이게 두고두고 한이 됐다. 그 뒤 결혼도 하고 사업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마흔 살 나이로 위와 같은 대형 사고를 치게 된 것이다.
1968년 2월 22일자 <경향신문> 기사 "공포의 대결 - 재일교포와 일 경찰"에 따르면, 방탄조끼를 착용한 무장경찰 150명이 여관을 포위하고 경찰 3000여 명이 온천장에 배치된 가운데, 권희로는 다이너마이트들을 여관 2층에 설치하고 공포탄을 쏘며 경찰을 위협했다.
마이크로 자수를 권유하는 일본 경찰을 무시한 채, 그는 NHK 등의 방송기자들을 여관 내로 불러 인터뷰를 했다. 그러고는 가슴에 쌓인 민족차별에 대해 하소연했다. 야쿠자를 죽인 것은 그들의 혐한 발언 때문이었다고 토로했다. 그들이 빚 독촉을 하던 중에 "조센징 더러운 돼지새끼"라고 멸시하는 바람에 그렇게 했다는 것이다. 어릴 적 경찰서에서 "조센징놈은 어쩔 수 없어"라는 말을 많이 들어 울분이 쌓였노라고 그는 회고했다.
일본 경찰은 권희로의 분노를 달래고자 그 옛날 그에게 모욕을 준 형사를 급히 수소문했다. 형사를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시켜 사과하도록 한 뒤, 권희로에게 TV를 틀 것을 권유했다.
하지만 그 정도 조치로 풀릴 분노가 아니었다. 사람을 죽인 것은 잘못이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스스로를 정당화할 명분이 많았다. 그는 자수 권유를 무시하며 무장 대치를 계속 끌어갔다. 그러다가 결국 체포되고 말았다. 사진기자로 가장해 접근한 경찰 7명에 의해 붙들렸다. 2월 24일, 권희로의 인질극은 그렇게 종료됐다.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그는 복역 31년 만인 1999년 석방됐다. 그 뒤 고국에 정착해 2010년에 눈을 감았다.
사회의 위기를 "혐오"로 풀어낸 일본
권희로를 비롯한 재일한국인들이 겪은 민족차별은, 일본 사회에 중대 위기가 발생할 때는 집단적인 혐한으로 표출되기도 했다. 위기 상황에서 민심 이반을 우려한 일본 정부 혹은 지배층이 재일한국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분위기 반전을 꾀하는 일들이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해서 독일 통합을 도모한 것을 연상케 하는 일이었다.
권희로가 태어나기 5년 전인 1923년의 관동 대지진 때는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한국인 음모론을 유포해 대중의 분노를 이쪽으로 유도했다. 한국인들이 대지진을 틈타 음모를 꾸미고 범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유언비어를 퍼트린 것이다.
청암대학교 재일코리안연구소 연구실장인 김인덕은 <극우에서 분단을 넘은 박애주의자 박열>에서 "적어도 6000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한 관동대지진은 유언비어가 발단이 되었다"면서 "조선 사람들이 지진의 혼란을 이용해서 폭행, 약탈, 방화, 여성 능욕, 폭탄 투척, 집단 습격, 우물에 의한 독극물 투약 등의 만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소문이 조선인 대량 학살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일제강점기 때 불령선인(不逞鮮人)이란 말이 유행했다. "불순한 조선인"이란 의미로 주로 독립운동가들을 지칭하는 표현이었다. 일본 발음으로 "후데이 센징"인 이 표현이 관동 대지진 당시의 일본열도에서도 유행했다. "조센징이 우물에 독을 넣었다"는 소문이 발 없는 말처럼 일본 전역으로 퍼지면서 "후데이 센징"을 운운하는 일본인들이 많아졌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2011년 3월 11일 동일본 대지진 뒤에도 유사한 양상이 보였다. 2018년에 <일본 근대학 연구> 제60집에 실린 노윤선의 "일본지진을 통해 바라본 혐한과 혐오 발언-관동 대지진과 동일본 대지진을 중심으로"라는 논문은 대지진 직후에 등장한 유언비어들을 이렇게 소개한다.
"동일본 대지진 이후 인터넷상에 나타난 피해지(피해 장소)와 관련된 헛소문으로는 "범죄가 일어나고 있다", "피해지에서 강도 다발(多發)", "칼을 들고 있는 외국인 절도단이 출현하고 있다", "시체에서 금품을 훔쳐가는 외국인이 있다"라는 등의 내용이 나왔으나, 소문의 발단은 파악하기가 힘들다."
위 논문은 그런 유언비어들이 재일한국인에 대한 차별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바로 일본 사회 내에서 재일한국인을 배제하는 단계로 변하였는데, 동일본 대지진 이후 혐한 시위 건수가 늘어난 것이다. 실제로 2013년 10월 30일에 공개된, 외교부가 처음으로 주일 공관별로 전수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009년에 30건에 불과하던 혐한 시위 건수는 2010년에 31건, 2011년에는 82건으로 늘어나더니 2012년에는 301건을 기록하였다. 3년 사이에 10배가 급증한 것이다."
위 논문에 따르면, 이때 등장한 구호 속에 "조센징을 죽이자! 학살하자!"도 있었다. 관동 대지진 때 등장한 "후데이 조센징"이란 구호도 현수막에 또다시 등장했다. 위기 때마다 재일한국인들을 분풀이 대상으로 삼는 일부 일본인들의 경향을 보여주는 현상이 아닐 수 없다.
자성의 목소리 커지고 있지만... 온라인으로 옮겨간 혐오
일본 내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작지 않다. 재일한국인들을 일상적으로 차별할 뿐 아니라 위기 시에 이들을 범죄집단으로 몰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반성하는 움직임이 2016년 이후 두드러지고 있다. 혐오 발언을 금하는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이라든가 "오사카시 헤이트 스피치 대처에 관한 조례", "가와사키시 공공시설물 이용허가에 관한 가이드라인" 등이 그런 움직임을 대변한다.
그로 인해 최근에는 공공 장소에서 혐한 시위나 혐한 발언이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문제가 근절된 것은 아니다. 오프라인에서는 줄어든 반면 온라인에서는 오히려 늘어났기 때문이다. 2019년에 <일본연구 논총> 제50호에 실린 박명희·최은봉의 논문 "일본사회 혐한의 확산-자정의 담론 구조와 한일관계의 부침"은 이렇게 보고한다.
""헤이트 스피치 대책법" 제정 등으로 일본 사회 내 자정 작용으로 오프라인에서의 헤이트 스피치 동반 데모는 줄어든 반면, 인터넷 상의 혐한은 더욱 과격하게 나타나고 있다."
윤설영 <중앙일보> 도쿄 특파원이 작년에 국민대 일본학연구소가 발행한 <일본공간> 제26권에 기고한 "2019년 혐한 보고서"에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군 위안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 "침묵, 일어서는 위안부(2017, 감독 박수남)" 제작위원회를 이끌고 있는 박마의씨는 "약 1년 전부터 일본 사회의 공기가 달라졌다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혐한 방지를 위한 법률과 조례가 제정되고는 있지만, 재일한국인에 대한 위협은 오히려 더 커지고 있다는 것이다. 온라인을 통한 인간 접촉이 늘고 있는 상황에서, 혐한 열기가 온라인에서 뜨거워지고 있으니 "공기가 달라졌다"는 표현을 쓸 만했던 것이다. 권희로가 울분의 인질극을 벌이던 시절 못지않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지금의 재일한국인들이 고통을 느끼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게시물은 한예지님에 의해 2020-02-27 11:33:31 민족/국제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