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로만 포장된 봉오동 전투의 진실을 밝힌다."
올여름 개봉한 영화 <봉오동 전투>는 국경을 넘어 추격해오는 일본군 추격대에 맞서 "날으는 호랑이"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우리 독립군이 만주 벌판 한가운데에서 장쾌한 승리를 거둔 역사를 그려내며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겼다.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봉오동 전투에 대한 대중의 관심도 높아졌다.
이를 계기로 봉오동 전투에 관하여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진 사실과는 다른 새로운 주장들도 활발하게 제기되고 있다. 특히 봉오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역이 홍범도라는 가장 기초적인 학설에 대해서도 이견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우리는 과연 봉오동 전투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대한민국의 첫 군대, 대한군무도독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마무리하는 한 해의 끝에, 이러한 의문점의 실마리를 풀어줄 학술세미나가 열린다.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이사장 최용규)는 대한군무도독부 창설 100주년을 맞아 더불어민주당 박찬대 의원실과 함께 오는 13일(금) 오후 2시부터 국회 의원회관 제9간담회실에서 <1910~1920년대 북간도 무장독립군과 대한군무도독부>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한다.
1919년 임시정부 수립 직후, 만주 봉오동에서 최진동·최운산·최치흥 삼형제가 사재를 털어 창설한 "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는 편성 당시 6백 명의 병력으로 참모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 등의 체계를 갖춘 정예 부대였다.
이후 안무의 국민회군, 홍범도의 대한독립군과 연합 사령부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구성함으로써 총 병력이 1천 명을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대한북로독군부는 결성 직후 압록강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전과를 올렸으며, 특히 6월에는 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신화로만 포장된 봉오동 전투, 그 진실이 드러날까
이번 학술세미나는 대한군무도독부와 대한북로독군부의 활동을 중심으로 당시 북간도 지역에서 일어난 여러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조직과 활동을 살펴보고 우리 독립군이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당시의 전투상황과 결과를 실증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획됐다.
세미나의 좌장은 중국·러시아 지역 한국독립운동사의 권위자인 한국외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가 맡았다. 발표자는 ▲1910년~1920년대 서간도·북간도·연해주의 독립군기지의 지역적 특징 (원광대 김주용) ▲1910년~1920년대 북간도지역의 독립군단체의 조직 및 상호관계 (한국외대 이숙화) ▲대한군무도독부의 조직과 활동 (국민대 이계형)으로 구성됐으며, 토론자로 신주백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 및 윤상원 전북대 사학과 교수, 심철기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연구원이 참여한다.
이번 행사를 주관하는 최운산장군기념사업회 관계자는 "당시 일본의 정규군과 정면으로 격돌했던 전투에서 승리한 우리 독립군의 무기, 병력, 작전 등의 군사력이 일본군에 필적할 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이 이제야 드러나고 있다"라며 "만주 무장독립운동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해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특히 "봉오동 전투의 현장이 지금까지 알려진 댐 아래가 아니라 그곳에서 10km 정도 더 깊숙이 들어간 산 위라는 것이 최근에야 밝혀졌다"라며 봉오동 전투의 실제 현장으로 추정되는 장소에 대해서도 공개할 예정이다.
이번 학술세미나를 통해 그저 신화로만 포장된 채, 여러 학설이 분분하던 봉오동 전투의 역사적 진실이 새롭게 밝혀질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이 게시물은 한예지님에 의해 2020-02-27 11:33:06 민족/국제에서 복사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