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10분 거리에 한강이 있다. 시간나는 대로 한강변을 걷는다. 외국 여행을 하다가 집에 돌아와 가벼운 옷을 입고 한강변을 걷다가 문득 놀란다. 한강이 특별하고, 내가 사는 땅이 특별하다는 사실이 느껴져서다. 너무 익숙하다보니 내가 사는 동네가 특별하다는 것을 잊고 지낸다. 지난 여름에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한 달을 보내다가 돌아와 한강변을 걷다가 찍은 사진 한 장을 보고서, 새삼 그 생각이 더해진다.
술에 대한 생각도 비슷하다. 세상에서 가장 쉽게 빚을 수 있는 술 경진대회가 있다면 막걸리가 1등을 할 것이다. 빚기 쉽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료를 구하기 쉽고, 환경의 영향을 덜 받고, 장비의 도움을 크게 받지 않고서도 막걸리는 사계절 빚을 수 있다.
쉽게 빚을 수 있는 막걸리의 매력
어디 보자. 와인은 짓밟아놓기만 하면 되지만, 포도 수확철에만 빚을 수 있다. 서두르면 10일이면 알코올 발효를 완료시킬 수 있고 그래서 보졸레누보라는 제품도 탄생한다. 하지만 와인은 1년 정도는 숙성시켜야 맛이 완성되니 기다리는 시간이 길다. 맥주는 맥즙을 달이는데 1시간, 이를 여과하는데 1시간, 홉을 넣고 끓이는데 또 1시간이 든다.
막걸리는 밥을 짓는 것보다 더 수월하게 증기로 고두밥을 쪄서 식히고, 누룩 한 장만 있으면 된다. 이제 누룩은 인터넷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외국에서는 한인마트에서 구할 수 있다. 중국 빠이주는 증류를 해야 하니 장비가 필요하고, 일본 사케는 맑게 걸러내야 하니 여과 공정이 까다롭다.
막걸리는 10일 정도 되는 시간에 완제품에 도달할 수 있는 속성주다. 상품화된 막걸리들도 짧게는 5일에서 평균 10일이면 완성되어 팔린다. 제품의 완성도도 집 술이 양조장 술에 밀리지 않는다. 막걸리 양조장 대표들은 동의하고 싶지 않겠지만, 마트에 파는 막걸리보다 집에서 직접 만든 막걸리가 더 맛있는 게 현실이다.
이는 집에서 어머니가 만든 김치가 마트에서 파는 김치보다 더 맛있는 이유기도 하다. 좋은 쌀을 쓰고, 대량 생산하거나 자동화하지 않고, 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데 필요한 감미료를 쓰지 않고, 신선하거나 무르익었을 때를 정확히 알아서 맛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요사이는 해외에서 살거나, 해외로 나가 살려는 이들이 막걸리를 배우러 막걸리학교를 많이 찾아온다. 향수 전문가가 파리 근교에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막걸리 양조장을 하고 싶어서, 독일 유학갔다가 그곳에서 직장 잡아 일하다가 은퇴한 공학도 아저씨가 맥주 양조를 하는 독일 친구들과 함께 막걸리 양조를 하고 싶어서, 이민간 부모님 때문에 인도네시아에서 나고 자란 30살 청년이 막걸리를 통해서 한국 발효 음식을 배우고 싶어서, 이민 가서 정신없이 살아온 LA 아줌마가 막걸리를 빚으면서 한인 공동체의 중심에 서고 싶어서, 뉴욕에서 식구들과 함께 사는 디자이너가 해외 생활의 단조로움을 깨고 싶어서, 한국 생활 20년째인 하얼빈 아줌마가 돌아가 한국 상품 막걸리를 제대로 빚고 싶어서, 막걸리학교를 찾아왔다.
11년째 운영되고 있는 막걸리학교에서 이런 현상은 올해 들어 눈에 띄게 늘어났다.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그곳에서 취업하게 된 자식을 따라 워싱턴으로 가는 교수 아줌마가 외로움을 달래려고 민화도 배우고, 소리도 배우고, 막걸리 빚기도 배우는 것을 보면서, 나는 막걸리 빚기야말로 한국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좋은 능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혼자 할 수 있는 손 기술이되, 그 결과물을 여럿이 함께 나누어야 반복할 수 있는데, 막걸리 빚기는 그 조건에 딱 맞다. 막걸리 빚기는 귀촌의 필수품에서, 이제는 외국 생활의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한 필수품으로 진화하고 있다.
이때 내가 주로 받는 질문이 "외국인들이 막걸리에 관심이 있습니까?"이다. 물론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은 한국 문화 콘텐츠로서 막걸리에 호의적이다. 막걸리와 친한 이들은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의 차이를 알아서, 한국에서처럼 현지에서도 상쾌한 생막걸리를 마시고 싶다고 말한다.
막걸리를 생판 모르는 외국인들이라 할지라도 그가 K-POP, 한국 드라마, 한국 화장품에 관심이 있다면, 더욱이 한국인 친구가 있다면 한국인들이 가장 쉽고 편하게 접하는 알코올 음료인 막걸리에 이내 관심을 갖게 된다.
뉴욕 맨해튼에서 싸이와 BTS의 존재를 아는 디자이너들이 점심시간에 김치찌개를 먹고 왔다는 것을 동료들에게 자랑스레 이야기하는 상황이, 막걸리를 향한 호기심으로 연동될 수 있게 만든다.
막걸리로 한국인의 삶을, 내 아버지의 삶을 이야기하기 좋다. 막걸리는 한국인의 주식인 쌀로 만든다. 어느 나라가 자신들의 주식으로 술을 만드는가? 찾기 쉽지 않다. 와인의 포도도, 맥주나 위스키의 보리도, 럼의 사탕수수도, 데킬라의 용설란도, 마오타이의 수수도 주식이 아니다.
이웃한 일본 사케는 식용의 쌀이 아니라 양조용 쌀로 넘어가 있다. 막걸리를 빚을 때 굳이 쌀을 많이 깎지 않고, 현미도 기꺼이 사용하는 것은 쌀 속에 담긴 영양분을 술에 담기 위해서다. 한국인은 쌀로 밥을 지어 끼니를 잇고, 떡을 만들어 잔치하고, 술을 빚어 봉제사 접빈객, 제사를 지내고 손님을 맞이했다.
술은 즐기는 사람들의 것
외국으로 막걸리 빚는 기술이 전파되는 것은 국가 자산의 유출이 아니다. 한국어처럼 태권도처럼 김치처럼 막걸리 기술이 보급되더라도 그 뿌리는 한국에 있다. 술은 전파처럼 경계가 없다. 술은 수신하는 자의 것이고 즐기는 자의 것이다. 막걸리를 열심히 빚어 여러 민족과 함께 나눠 마시되, 그 맛이 더 궁금하다면 한국을 여행하게 하면 된다. 한국에는 동네마다 막걸리 양조장이 있고, 양조장마다 술맛이 다르고 인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K-POP에 매료된 외국인들은 한국말은 해독하기 어렵지만, K-POP의 음률에 맞춰 함께 노래 부르고 함께 춤을 추며 즐긴다. 그 모습을 보면 신기하고 유쾌하다. 막걸리는 한국인들이 하루 세끼를 먹었던 쌀로 만든 하얗고 부드럽고 순한 음료다. 음악처럼 여럿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공동체의 음료이자 음표다.
한강과 북한산을 두고, 천만 명이 사는 도시에 넓은 강이 있고 수려한 산 능선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라고 평한다. 한강과 북한산이 너무 익숙하여 가늘고 낮게 보였다면, 그건 우리를 너무 작게 여겼기 때문이다. 서울, 한강, 북한산, 막걸리는 어디에 내놓아도 작지 않다. 그런데 그중에서 옮겨다닐 수 있는 것은 막걸리뿐이다.